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회의 (문단 편집) == 여파 == 비스마르크는 이 베를린 회의를 통해 발칸반도를 둘러싼 서유럽 열강과 러시아 간의 갈등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봉합책에 불과했으며, 이 때 해결되지 않고 억눌러진 [[발칸 반도]]의 민족 분포 및 국경 문제는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을 겪은 끝에야 간신히 일단락되었으며, 결국 70년 뒤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경계선 바깥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각 구성국 인원들이 모두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하고''' 나서야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크로아티아]] 일대에 살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에서 크로아티아가 승리함에 따라 거의 [[세르비아]]로 추방되었고[* 당연하지만 그 전에는 세르비아 점령지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이 추방되거나 학살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살고 있던 [[무슬림]]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쪽에서 대대적으로 학살당한 끝에 데이턴 협정으로 각 민족별로 구획을 정하고 [[게토]]처럼 거기서만 거주하게 되었다. 물론 저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발칸반도의 모든 민족들을 각각 독립시키는 것 또한 전혀 현실적이지 못했다. 설령 (이미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강대국들이 대승적으로 양보해서 발칸반도 민족들을 각각 독립시켜주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족들이 같은 지역에서 서로 뒤섞여 살고 있었으므로 어떻게 국경선을 정하든지 다수민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국경 내에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원래부터 태생 자체가 10개가 넘는 민족들이 포함된 다민족 국가였고, 헝가리처럼 독자적인 의회가 존재하고 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지역들도 있었다. 통치에 어려움이 많긴 했지만 그럭저럭 그런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대안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때 차지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두고두고 골치를 앓다가 [[사라예보 사건|결국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제1차 세계 대전|비스마르크가 언급한 이 "바보짓"을 기폭제로, 전 유럽은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유럽 열강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는 게 분명해졌고, 여전히 자신의 영토를 지킬 힘이 없는 상태로 붕괴가 약간 늦춰지기만 했지 결국 붕괴가 조만간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회의는 결국 오스만 입장에서도, 또는 발칸 반도 민족들의 입장에서도 외교적 미봉책에 불과하게 되었다. 소소하지만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흥의 기폭제가 되었다. 알바니아 민족영토 보전을 주장하던 [[프리즈렌 동맹]]은 베를린 회의에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무장봉기로 선회, 할양된 영토를 확립하러 오던 주변국군과 알바니아 자치에 반대하던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였고 이 봉기는 실패하지만 알바니아 민족 개념의 확립과 추후 봉기들에 영감을 주게 된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하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 만큼의 외교적 수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물론 비스마르크의 유럽 구상 자체가 그와 같은 천재가 아니면 유지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러시아 제국]]은 300년에 걸쳐 지리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펼친 끝에, 드디어 대승을 거두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는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서유럽 국가들의 방해에 의해 남방 진출을 봉쇄당했으니 러시아 입장에서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 밖에. 베를린 회의에 참가한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Горчако́в, 1798 ~ 1883)는 베를린 회의를 자신의 외교관 경력 최악의 날이었다고 회상했고, 황제원 3부의 수장이자 역시 베를린 회의에 참가했었던 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슈발로프(Граф Пётр Андре́евич Шува́лов, 1827 ~ 1889) 백작이 이 문제로 실각당할 정도로 러시아 전역이 서유럽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다.[* 당시 슈발로프는 '표트르 4세'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다. 그런 권력자마저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권력을 잃을 정도였으니 당시 러시아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셈.] 그리고 [[3제 동맹]]은 박살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 역시 낭패를 본 것이 아닐까 싶지만, 노련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순간 분노에 차서 3제 동맹을 탈퇴하더라도 다른 유럽 국가 중 그들의 우방이 되어줄 국가가 없기에 러시아가 다시 3제 동맹으로 복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까지 감안하고 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실제로 3제 동맹은 1881년에 복구된다. 즉, 비스마르크는 3제 동맹과 유럽 내 강대국 간 균형 유지라는 양대목표를 동시에 성취한 셈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독일이 처할 대외정치의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우선 비스마르크의 '우리 독일은 이 위기상황을 통해 어떤 이득도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태도는 전 유럽을 만족시킬 만한 게 아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은 독일 제국의 처신에 매우 분노했는데, 러시아 황실은 독일(프로이센) 황실과 오랜 친분을 맺고 있었으며[* 러시아 황실인 로마노프 가문 자체도 독일계 혈통을 지닌 가문이었으며, 귀족들도 독일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독일인이 [[표트르 3세|차]][[예카테리나 2세|르]]가 되기도 했다.]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친프로이센 정책과 중립적인 태도로 도움을 준 일 때문에 프로이센의 후신인 독일이 러시아에게 이득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일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에 대해 러시아 전역이 분노했지만 특히 독일을 향한 분노는 심각해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독일제국의 카이저인 [[빌헬름 1세]]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내고[* 더군다나 [[알렉산드르 2세]]는 [[빌헬름 1세]]의 조카였다. 조카가 삼촌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낼 정도로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분노는 실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독일-러시아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할 정도였으며, 이는 독일과 러시아 양측 모두 서로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삼제동맹 복구는 순전히 비스마르크 개인의 외교 역량에 따른 결과이지 모순된 독일의 대외정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내부 문제로 인해 그 복구된 삼제동맹 속에도 모순은 존재했다. 당시 유럽이 그랬듯 독일에서도 민족주의가 기승하여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은 그저 '대독일주의'의 일부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러시아와의 동맹 또한 러시아가 독일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때문에 독일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황에서 우방이 없어 꾸역꾸역 삼제동맹에 복귀한 것에 불과했던게 다시 재구축된 삼제동맹의 실태였다. 그런 상황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다시 독일은 러시아와의 신뢰구축에 적극 나섰어야 했지만, 지배층인 [[융커]]들의 입김에 영향을 받은 독일 정부는[* 비스마르크 본인부터가 융커였고, 이들은 독일제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러시아 곡물에 관세를 매기는 등 사실상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를 지속했다. 당연히 러시아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를 갈 수밖에 없었지만 전 유럽 국가로부터 왕따 취급을 받아 견제받고 있었으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비스마르크 재임기에는 독일이 처한 모순된 외교안보 상황을 그의 절묘한 외교술로 억누를 수 있었으나, 결국 [[빌헬름 2세]]의 제위와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에는 이 모순이 폭발하고 만다.[* 애당초 빌헬름 2세가 지나친 욕심으로 크게 말아먹은 것이지 비스마르크의 전략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여전히 중용하고 그 이후에도 그냥 그러한 기조를 유지했다면 이후의 유럽 정세는 독일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막고 독일이 분단되지 않고 사이비 입헌제가 아닌 진짜 입헌군주국으로 현재까지 남았을 수도 있었다.]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만을 들어주고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연장을 거부하며 러시아를 배척하자, 이에 러시아는 독일 통일 후 꾸준히 독일 상대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프랑스와 접촉하여 [[러불동맹|1894년 동맹을 맺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며 프랑스를 고립시키자는 비스마르크의 외교 대전략은 이렇게 붕괴되었으며, 그렇게 독일은 양 국가에 의해 포위당하게 되었다.[* 사실 러불동맹 자체가 매우 어색한 형태이긴 했다. 당시 유럽에서 스위스와 더불어 유이한 공화국이었던 프랑스가 유럽에서 강력한 전제군주국인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두 국가가 단지 전략적인 이유로 동맹을 맺은 것인데다가, 게다가 대독일 포위의 핵심 열쇠를 쥐고있던 영국은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독일 입장에서 프랑스는 독일 통일 이후 쭉 적국이었다 치고, 권력층인 융커들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까지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영국하고는 친하게 지냈어야 했다.''' 하지만 [[세계 정책]]으로 대변되는 빌헬름 2세의 적극적인 제국주의, 팽창주의 성향은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있는 영국의 심기까지 제대로 건드렸다. 원래 영국은 프랑스와는 몇백년 동안 서로 대립하는 사이었고, 러시아와도 [[그레이트 게임|유라시아 대륙 곳곳에서 대립하는 사이었으나]] 독일의 국력이 성장하고 독일이 팽창주의를 부르짖음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1904년 [[영불협상|프랑스와 협상을 맺었고]] 러일전쟁으로 그레이트 게임이 영국의 승리로 일단락된 1907년에는 [[영러협상|러시아와 협상을 맺어]] [[삼국 협상]]이 형성된다. 이에 대항해 독일은 [[이탈리아 왕국]]을 끌어들여 파탄난 삼제동맹 대신 새로 [[삼국동맹]]을 맺었으나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서로 친하게 지낼 수가 없는 관계였고[* 이탈리아 입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신성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상전 노릇을 하면서 [[이탈리아 통일|통일]]을 가로막은 원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탈리아어권 지역인 [[트렌티노]]와 [[이스트리아]], [[달마티아]]의 지배권을 두고 사이가 최악이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선전포고하고 삼국동맹을 탈퇴한다.] 결국 독일이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라고는 내부 사정상 독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파멸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또한 동아시아에도 이 회의의 내용 및 결과가 영향을 받게 되는데 우선 당시 신강 지역에서 일어난 [[야쿱 벡]]의 봉기를 청나라가 진압하면서 그 틈에 해당 지역에 있는 일리란 지역을 차지한 러시아와 청나라가 갈등을 빚었지만 당시 베를린 회의의 여파로 인해 청나라를 더 몰아붙일 수 없어 할 수 없이 배상금만 받고 일리 지역의 상당수를 반환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나라는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이 명목상으로 나마 발칸 반도 지역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중화 특유의 조공 체제 역시 서구식 외교 체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 해당 내용을 조선에(...) 적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필 왜 조선이냐 하면 베트남은 프랑스로 인해 청나라가 손을 쓰기 힘들었고, 류큐는 러시아 견제 때문에 일본에 사실상 양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이 청의 알선으로 조선과 조약을 맺을 땐 이런 바람이 상당 부분 먹혀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등으로 인해 청나라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반대로 조선에선 발칸 반도들의 여러 나라들을 독립시켜 준 러시아에 대해 호감을 가져 인아거청이라고 당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과 이로 인해 간섭이 심해진 청나라와를 배제하려는 계획[* 러시아에 대한 호의는 단순히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발칸 반도 여러 나라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에 파견된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 중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의 태도가 가장 호의적이었던 탓도 컸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의 [[원세개]]는 조선에 파견된 다른 외교관과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미국 등의 고문들에게 오만한 자세로 인해 욕을 먹었고, 영국에서 파견된 총영사(당시 공사관보다 한 급수 낮은 외교공관으로 사실상 청나라가 주장하는 조선의 속국화를 영국이 인정한 꼴이라 조선에서 더 마음에 안들었다고) E.C 베이버는 한밤 중 한양 시내에 총을 쏜다는 등의 각종 기행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미국은 그나마 조선과 사이가 좋았지만 당시 [[먼로 독트린]]의 영향으로 대외 활동에 소극적이었던데다 [[필립 제이슨]]등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여저서 서먹했고,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화와 이로 인한 청나라와의 갈등으로 조선이 접근하기 꺼림직했다고.또하 당시 떠오르는 신생 세력인 독일 제국같은 경우 식민지 개척에 소극적이고 유럽의 현상 체제를 유지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으로 조선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같은 강국을 이겨낸 직후 자신감 만빵인 상태에서 약소국인 조선이 근대화를 위해 접근하려니 조선에게 갑질을 좀 해대서 조선에선 당시 군사 제도 개혁을 프랑스나 미국을 모델로 세울 수 밖에 없었을만큼 협력을 구하기 힘들었다고.[[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21449479|#]]]을 세웠지만 이를 눈치챈 영국이 [[거문도 사건]]을 일으키고 뒤이어 원새개가 2차 한러 밀약이 있다고 폭로한 끝에 사실상 러시아와의 협력이 무사되나 싶더니 [[청일전쟁]]과 뒤이은 [[삼국협상]]으로 다시 형세가 바뀌고, 이후 이런 저런 흐름 끝에 [[러일전쟁]]으로 조선은 발칸 반도와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여담으로는 당시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 회담을 끝마치고서 다우닝가 앞에서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솔즈베리 경]]과 내가 여러분에게 평화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명예로운 평화를 바랍니다.''' ''라는 연설을 했는데 후에 두번째로 독일에서 영국 총리([[네빌 체임벌린]])가 가져온 명예로운 평화는 [[뮌헨 협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